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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인천 월미도 한국이민사박물관 도산 안창호선생님

by OneThreeThree 2024.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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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갈 곳이 없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살고 있는 인천에서 결혼도하고 아이를 낳고 어디쯤 가볼까 생각하다 보면참 갈 곳이 없습니다.

송도나 청라 등 신도시들이 생기면서 쇼핑몰이나 공원 등 갈곳이 조금은 생기긴 했죠.

갈 곳 없는 인천에서 그래도 대부분 아는 제일 유명한 월미도는 인천에서는 유명한 곳입니다.

 

월미도는 인천에 오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은 방문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얘기해야 하는데 왜 자꾸 월미도를 이야기할까요.

저도 처음 알았지만 월미도 바로 옆에 박물관이 있었는데 그곳이 한국이민사박물관이었습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한국이민사박물관은 2003년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선조들의 해외에서의 개척자적인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인천광역시 시민들과 해외동포들이 함께 뜻을 모아서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사박물관입니다.

우리나라 첫 공식 이민의 출발지였던 인천에 한국 최초의 이민사박물관을 건립함으로써 100여 년의 한인 이민역사를 체계화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국내외 동포사회의 네트워크 형성을 통하여 과거 지향이 아닌 700만 동포들의 삶과 애환이 살아 숨 쉬는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장소로서 한국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박물관이 되도록 관장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2003년도에 이민사박물관을 추진하게 되었고 2006년도에 건축공사를 시작해 2008년 개관한 박물관입니다.

박물관을 보니 인천시립박물과 이외에도 최초의 박물관이 또 있었네요. 학창 시절 월미도로 소풍을 자주 갔었는데

이곳이 제 기억에 없는 걸까요? 분명히 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입니다.

 

관람안내

월미도 2 주차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박물관 별도의 주차장도 마련되어 있고 맞은편에 인천해사고등학교가 위치해 있습니다. 월미도에 진입하실 때 삼거리를 아시나요? 

월미도 갈 때 항상 삼거리에서 우회전만 해서 좌해전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이번기회에 좌회전 한번 하겠네요 :)

kakao Map

 

단체예약도 가능하며 대관도 가능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인천시청 홈페이지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주소

한국이민사박물관

인천시 중구 월미로 329 (북성동 1가)

 

관람시간

09:00 ~ 18:00

관람 마감시간 30분 전까지 입장가능

 

정기휴일

매주 월요일(공휴일인 월요일은 제외), 1월 1일

 

관람요금

무료

 

전시해설

10:00~17:00 문화관광해설자 해설 진행

10:30, 13:30, 15:00 정기해설

희망 시 안내데스크 문의

 

관람문의

032-440-4710, 4711 (휴관일은 전화 불가)

 

 

시설안내

이민사박물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되어있습니다.

지상층은 상설전시장으로 지하 1층은 기획전시실 및 수장고와 영상시설을 갖춘 30여 석의 강당으로 되어있습니다.

별도의 사무동이 있고 사무동에는 임시 수장고와 수유실 등이 있습니다.

 

 

상설전시실은 1 전시실부터 4 전시실까지 4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민사박물관의 이야기가 홈페이지게 게재되어있는 내용을 인용하였습니다.

 

제1전시실

미지의 세계로

 

이민의 출발지였던 개항 당시의 인천을 소개하고, 우리나라 첫 공식이민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국내정세 및 하와이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민자들을 싣고 하와이로 떠난 첫 선박인 갤릭호 모형을 통해 당시 이민자들의 길고 험난했던 여정도 생생히 체험해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우리나라는 서구 열강의 조선 진출에 따른 이권 개입 경쟁에 의해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94), 러일전쟁(1904)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치적 사건들이 사회적 혼란과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혹독한 굶주림이 계속되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은 한국에서 쌀과 곡물들을 대량으로 반출해 감으로써 양곡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빈곤이라는 경제적 요인과 불안정한 정세를 벗어나려던 정치적, 사회적 요인으로 하와이로 이민을 결행하게 되었다.

 

당시 하와이에서는 설탕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미국 공사이자 선교사인 알렌(H.N.Allen)의 활동이다. 그는 1884년 조선에 도착한 이후 고종 황제의 주치의로 발탁되어 황실의 신망을 얻었고, 이로 인해 조선의 정치 문제에 깊이 간여하여 양국 정부 간의 핵심적인 중재자로 큰 역할을 하였다. 알렌은 이민 관련 업무에 데 쉴러를 추천하였고 데 쉴러는 고종 황제로부터 하와이 이민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후 1902년 12월 22일 월요일, 하와이 첫 이민단 121명이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우선회사 현해환(겐카이마루)에 승선, 일본 나가사키 항을 향해 2일간의 항해에 올랐다. 가족 친지들과 눈물의 이별을 한 이들은 12월 24일 나가사키 항에 도착하여 검역소에서 신체검사와 예방접종을 받고, 하와이로 가는 미국 태평양 횡단 기선 갤릭호(S.S Gaelic)에 탑승했다.

 

처음 121명이 인천 제물포를 떠났으나 일본 나가사키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19명이 탈락, 102명만이 갤릭호(S.S Gaelic)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생각해 보면 이민을 선택했던 분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개항을 통해 인천으로 유입되는 신문물과 신종교 등을 접했던 인천 사람들 중 뭔가 다른 삶을 바라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해외로 개척하고자 했던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 당시 이민을 설득했던 인천 내리 교회(옛 제물포웨슬리메모리얼교회) 담임 목사 존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제2전시실

극복과 정착

 

 

하와이에 정착한 한인들의 애환과 개척자로서 미국 전역에 뿌리를 내린 발자취 등을 담은 사진자료 및 유물을 볼 수 있다.

사탕수수농장 한인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생활을 담은 영상과 하와이 한인학교를 연출해 놓은 교실에서는 그 당시 사용 했던 교과서가 전시되어 있다.

 

하와이 첫 이민자들은 갤릭호 편으로 1903년 1월 13일 새벽 호놀룰루에 입항하였다. 그들은 검역과 입국 절차를 마치고 협궤열차에 탑승하여 오아후 섬 와이알루아(Waialua) 농장 모쿨레이아(Mpkuleia)에서 본격적인 이민 생활을 시작하였다.

 

1905년 하와이에는 약 65개의 농장에 5,000여 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혼합 농장에서 다른 민족들과 더불어 생활했다. 사탕수수농장에서는 십장인 ‘루나’의 감시를 받았고 뜨거운 햇빛 아래서 힘든 노동도 견뎌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농장에서의 규칙적인 생활과 제도의 압박감이었다.

 

한 달 일을 마치면 목걸이처럼 걸고 다녔던 번호에 따라 현금으로 월급을 받았다. 1905년까지 어른 남자의 월급은 한 달에 17달러 정도였고, 여자나 소년들은 하루에 50센트를 받았다.

 

이 당시 혼기를 훌쩍 넘긴 노총각들의 결혼 문제는 초기 이민자들의 정착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당시 남성의 수가 여성보다 10배나 더 많아 배우자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궁여지책이 사진결혼이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중매쟁이를 통해 약 700여 명 정도의 사진신부들이 결혼하기 위해 하와이로 건너갔다. 사진만 보고 결혼을 하다 보니 그들의 평균 나이 차이는 무려 15살이나 되었다. 이로서 본격적인 초기 한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사진신부들 또한 개척자로서 강인하고 적극적인 삶을 꾸려나갔다.


지금생각해 보면 정말 상상도 안 되는 일들.자신의 선택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 아닐까요? 가족들과 생이별하면서 사진으로 결혼을 하다니.1905년까지 하와이로 향한 한인은 7천400명이라고 합니다.

 

하와이 정부에서는 기후는 온화하고 심한 더위와 추위가 없고 모든 섬에 학교가 있어 영문을 가르치며 학비를 받지 않는다고 홍보하며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했다고 합니다. 

 

근데 안 봐도 뻔한 그림이 펼쳐집니다 사탕수수농장에 배치된 이민자들은 뜨거운 햇빛과 관리인의 감시를 받으며 노예처럼 힘든 노동을 견뎌야 했고 하루 10시간씩 일하며 잠시 일어나서 쉬려고 하면 가죽 채찍으로 내리쳤다고 합니다.

 

격국 자본주의에 노예로 팔려간 거 아닙니까?하와이에서는 이익을 위해 거짓홍보를 통해 인력을 확충하려 했고 한국에서는 인원모집하면 수수료를 챙겨주는 형식으로 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나쁜 놈들.


 

제3전시실

국경을 넘어 세계로

 

한인들의 이주는 우리나라 공식 이민의 시작인 1902년 미국 하와이 이민 이전인 19세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한말의 불안한 정세와 계속되는 가뭄으로 한인들은 국경을 넘어 현재 중국과 러시아 땅인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이 1875년에 청나라 발상지인 만주지역의 봉금령을 해제하고 이 지역으로의 한인들의 이주 및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자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의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한인들의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연해주 지역에도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이주가 진행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인들의 일본 이주도 본격화되었다.

일본 이주는 초기 유학생을 시작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농민, 노동자들의 이주가 이어졌다. 한편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한 일본은 70만 명이 넘는 한인들을 강제동원하여 일본 국내뿐 아니라 사할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중국, 러시아, 일본, 사할린 등 한반도 주변 지역으로의 이주가 본격화된 가운데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들은 1937년 스탈린 정권의 한인 이주 정책으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강제로 이송되면서 한인들의 거주지는 주변국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확장되었다.

 

한편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중남미와 독일 등지로 이주가 이루어졌다. 

 

중남미 이주는 1905년의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의 이주가 그 시작이다. 이후 멕시코의 혼란을 피해 1921년 쿠바로의 이주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때의 이주는 일제강점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지속되지 못하였다. 본격적으로 중남미 이주가 이루어진 것은 1962년 이후이다. 새로운 일터를 찾아 브라질과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지로 이민이 이루어졌다.

 

독일 이민은 1960년대 광부와 간호사의 파견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당시 서독은 경제성장과 함께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고, 우리는 외화부족과 실업의 대책으로 광부, 간호사, 조선기술자 등 많은 인력들을 파견하였다.

 

아울러 3 전시실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이민이라 할 수 있는 해외입양과 관련하여 그 원인과 상황, 인천지역의 역할을 전시하고 있다.  

 


 

주요 유물

 

이민사박물관으로 이민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유물들을 보면서 이민사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네요

 

에네켄(henequén) 기계는 2005년 12월에 한국이민사박물관 개관을 위해 멕시코 티치몰아시엔다(Ticimul Hacienda)에서 구입한 유물이라고 합니다.

 

에네켄은 용설란(龍舌蘭)과의 식물로 19세기 산업용 노끈밧줄 등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으며, 에네켄 제품은 전 세계로 수출되었다. 이러한 에네켄 산업의 활성화는 1905년 한반도에서도 노동력 제공을 위해 멕시코로 이민을 떠났다고 합니다.

 

에네켄 기계는 에네켄의 껍질을 벗기는 기계로 본체부와 엔진부로 나눌 수 있다멕시코 전역의 아시엔다에 에네켄 기계가 대부분 설치되었으며초기에는 스팀 엔진(Steam Engine)을 사용하였지만 이후에는 디젤 또는 가스엔진을 사용하였고본관의 에네켄 기계의 엔진은 부다(BUDA)사에서 만든 디젤 엔진을 사용하였다.


 

하와이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님

 

한국이민사박물관을 포스팅하면서 도산 안창호 선생님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저 독립운동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기회에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네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190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학을 공부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동포들의 어려운 삶을 보고 교육과 민족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했고 거기서 대한인공립협회를 설립해 공립신보를 발행했습니다. 선생님이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섬 오른쪽에 있는 웅장한 다이아몬드 헤드 산을 보고 감명받아 선생님은 자신의 호를 도산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도산은 섬과 산을 뜻하는 한자로, 저 산처럼 굳건하게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도산 선생님은 하와이에서도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했습니다. 선생님은 하와이에 있는 한인들을 교육하고 단결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흥사단을 창설, 대한인국민회의 중앙총회장이 되어 하와이에서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고, 강연회와 기념식을 개최했했습니다. 하와이에서 독립을 위해 자금을 모으고, 임시정부로 자금을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도산 선생은 하와이에서 활동하면서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가 되고 독립운동의 방향과 전략을 수립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상해로 소집, 연통제를 만들어 독립운동의 조직을 강화했습니다.

 


이민사를 통해서 많은 것들을 아이들에게 얘기 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그 일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네요.

 

제일 친한 친구가 올해 5월 브라질로 이민을 가게 되는데 많이 아쉬워하면서 이민에 대해 궁금해하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딸이 지금과는 너무 다른 이민에 대한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모든 자료에 대한 출처는 인천광역시 한국이민사박물관 홈페이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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